행복한 목포성서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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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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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부르심



목사안수를 위한

 

 

신앙고백

 

 

 

 

 

1. 구원 간증 & 소명 간증


1) 주님을 믿기 전 ==========================

 

디모데전서 2장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대한민국 국도 1호가 시작되는 전라남도 목포라는 곳, 정치적 아픔과 가난이 함께 뒤범벅되어 있는 곳이라 표현하고 싶은 암울한 그 땅에도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고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저의 구원 간증을 하려고 합니다.

가난이 찌든 곳, 특별히 목포에서 가난한 곳으로 말하자면, 유달산을 끼고 형성된 달동네라고 표현하는 곳 중 한 곳이 제가 태어난 서산동입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배경을 가진 모태종교인으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름성경학교를 비롯한 주일학교의 모든 프로그램은 무조건 참석해야했습니다. 더욱이 온 가족이 교회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 열심을 본(?)받아 따라 다녔습니다.

암송과 율동도 남 못지않게 잘 했고, 귀염둥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착한 아이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교회 다니는 생활이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누가 보더라도 착한 아이였습니다. 더욱이 서산동이라는 동네는 바닷가를 끼고 있기 때문에 어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렇다보니깐, 만선이 되어 들어오는 날이면 난리 아닌 난리가 벌어집니다.

술 먹고 부부싸움하고, 살림살이는 깨지고 아이들은 울고 ……. 이런 분위기의 동네였지만 우리집 만큼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없이 살았습니다.



<가족이 종교생활을 하게 된 배경>

 


특별히 우리 가족이 교회에 열심인 이유에 대해서 조금 언급해야 할 듯 합니다.

어머니 말씀에 우리가 교회 다니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지체 장애자 1급이신 큰 형님(현재 52세)때문이었습니다. 태어날 때 돌팔이 산파 때문에 아이가 죽은 줄 알고 연탄찌게로 꺼내었는데 생명이 살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서산동에서 우리집을 말할 때 ‘찌게네, 찌개네’라고 말했습니다.
큰 형님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큰 형님은 열병으로 인해 아예 일어나지 못하고 기어서 다니며 생활해야 하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까지는 우리 집이 오 씨 장손이기에 제사가 무려 10번 가까이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꼭 필요한 집이었습니다.

큰 형님이 저렇게 된 후 어머니는 더욱 더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렇게 가난해도 굿이라는 굿은 다했습니다. 누님들이 말씀하기로는 “우리집은 굿하는 날에야 떡을 먹는 날”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굿해가면서 아들, 아들하며 낳으신 분들이 저희 세 누님들이었습니다.
셋째 누님이 태어날 때는 아버지조차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에 낳은 아이가 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어머니가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낳은 지 삼일도 못되어 죽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그 죽은 아들을 품에 몇일을 품고 사셨습니다. 아버지와 큰 누님이 그 죽은 아들을 산에다 묻고 돌아왔을때 어머니는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누님의 말에 의하면 혼이 나간 사람처럼 집 안 구석구석에 조상 모셔놓은 항아리들 10개 모두를 깨뜨리시면서 ‘귀신 있으면 나 잡아가라.’ 소리치고 아버지에게 ‘나 교회 나갈테니 잡지 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처녀때 감리교회를 다니셨고, 그 감리교회 목사님이 어머니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때 꼭 교회 나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일로 인해 어머니가 결혼하신 후 교회에 첫 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한나의 서원처럼 ‘아들을 주시면 주의 종으로 헌신하겠습니다!’ 하면서 기도했고, 그래서 얻은 형님이 바로 지금 불광동 성서침례교회 찬양사역자로 쓰임 받고 있는 오상률목사님이십니다.

그리고 난 후 생각지도 않은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창피하시다고 하시면서 고민을 했었고, 그 고민은 아버지(그 때 연세가 45세)의 말 한마디로 해결되었습니다. ‘딸이여도 좋이니 낳으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20여년 이상 매 예배 때마다 앞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경건한 신앙인이셨다고 자부할 만큼 열심이셨습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온 가족이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섬겼고, 주일성수하며 새벽기도까지 드리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저희 누님 중 한분은 은 목포노회(장로교회연합회) 학생부 부회장까지 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형님은 중, 고등부 회장을 맡을 정도로 믿음 좋은 형님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생활에 열심히 한 종교적인 집안이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저 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비롯한 온 가족의 노력은 타인의 본이 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종노릇하던 우리 가족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의 사랑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2) 주님을 영접하게 된 동기 ========================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평생을 기어다니셔야 하는 지체장애자 1급인 큰 형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20여년간 다닌 교회의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 집에 오셔서 구역예배를 드릴때면 불쌍하다고만 이야기 할 뿐이지 누구 하나 형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주거나, 관심 가져준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해 주는 청년들을 요구했지만, 심지어는 불편함을 나타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86년 제가 중 2때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첫째로는 지체장애자인 큰 형님에게 일이 생긴겁니다. 소망없이 살아가던 형님에게 어떤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따뜻하게 형님을 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여호와증인인 그들이 이단임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집에 못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던 교회에 몇번을 집에 와서 성경을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상황에서 어머니는 여호와증인들이 불쌍한 형님을 사랑해 주고, 저렇게 와서 챙겨주고, 만나준 것만해도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만나는 그들 역시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몇 달 정도되니깐, 여호와의 증인은 부모님께 형님을 그곳 집회소로 엎고 데려고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형님도 그것을 원하는 분위기였지만,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할때는 어떤 믿음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이 큰 형님 때문에 불쌍하고, 창피하다는 것이 이유인것 같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몇일 되지 않아 우리집에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직도 그 때 그 장면은 머리에 사진 한 컷처럼 또렷하게 생각이 납니다.

교회 고등부 학생회 회장직을 감당하고 있던 형님(지금 불광동 찬양목사님)이 아침밥을 먹고 학교가야 하는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형님은 모범생이었기에 저녁 늦게 들어오는 법이 없었는데 지난 밤에 굉장히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어머니에게 ‘자기가 이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이제 알겠다, 믿겠다’고 하면서 어제와는 딴 사람이 되어서 어머니를 자기가 가본 교회 집회를 한번만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어머니에게는 형이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는 분위기였기에 ‘그 교회 한번 가보자’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때 밥상에 밥 먹던 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안다니다가 초청받아 간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했던 형님이 왜 갑자기 예수님을 믿니 안믿니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더욱이 다니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간다는 것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 때 그 장면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형님 모습이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밥도 안먹으면서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 예수님 사랑에 대한 강한 확신을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가 혼자 가시기 부담스러웠는지 저를 데리고 그 교회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간 교회가 바로 성서침례교회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서침례교회에서 복음 전도 집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성서침례교회가 너무 이상해 보였습니다. 이상해 보인 이유는 술집(그때 당시 남일극장 옆에 있는 지금 아리랑회관)을 개조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것이었습니다.

빨간 카페트와 거울들....... 후에 알게된 사실은시대적으로 80년대의 목포 분위기는 서울에 서진룸싸롱 사건이 있은 후 대대적인 조직폭력배 검거가 국가적으로 붙잡은 상태에서 그쪽과 관련된 유흥업소들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일때 였습니다. 그 쪽 일대가 문 닫고 조직폭력배들이 정리되는 분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문을 닫아 사용하지 않던 술집중 큰 홀을 임대해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상한 교회처럼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술집이 변하여 교회가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손에 끌려 성서침례교회라는 곳, 목포성서침례교회(그때 당시 노향모목사 시무)을 처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안내위원들의 사랑이 넘치는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시는 목사님은 온 몸을 불사르는 듯한 열정으로 설교를 하셨고, 더욱이 신선한 것은 목사님을 바라보는데 너무 신사적으로 보였습니다.
어렸을때 내가 가 본 부흥회처럼 헌금을 강요하거나, 의도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유도하려는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끝났다 싶었는데 갑자기 무슨 초청의 시간(나중에 침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알았던 부분- The Alter Calling -찰스 피니때 가장 강력하게 사용했던 초청방법 중 하나)이라고 하면서 눈 감으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이 ‘예수님 믿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했더니 우리 어머니께서 제 손과 함께 손을 들어버렸고, 저는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어르신(당시 교회 장세형성도님)이 나를 데리고 사방이 막힌 상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상담 받으러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학생2명과 함께 상담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구령상담이었고, 저는 질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고, 이미 다 알고 있기에 대답만 열심히 ‘네, 네’했더니 구원받았다고 축하한다고 하면서 무슨 결심카드를 쓰셨습니다.


먼저 나온 관계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상담은 많은 시간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지금 하늘성서침례교회 노명학 목사님 아내되시는 한영배사모님과 복음상담을 나누다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한 어머니께서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눈이 뚱뚱 부어 나오셨고, 집에 가시는 내내 어머니는 뭐가 그리 감사한 지 눈물을 흘리시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시면서 집에 가셨습니다.

“형님도 사람이 변해보였고, 어머니도 저렇게 예수님이 좋으시다고 하는 데 나는 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간에 성서침례교회 사역자님들이 집에 심방오셔서 아버지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셨고, 큰 형님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 주간은 우리 가족에 복음을 듣게 하셨던 기적과 같은 주간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자연스레 여호와의 증인과는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 일로 우리 집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온 식구가 20여년 이상 다녔던 장로교회에서 성서침례교회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일 아침에 故 하대희 장로님의 아내되시는 권사님께서 우리 집 소식을 들으셨고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저희어머니에게 ‘너희들 가면 안돼, 가긴 어디를 가, 지금까지 다니던 교회가야지. 어딜가?’하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는 ‘권사님 천국에서 뵈요’라며 말하시면서 눈물과 함께 성서침례교회에 발걸음을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만나 거듭난 날>

 


구원, 십자가의 복음 앞에 반응....

그런데 문제는 저와 우리 가족들과는 달랐다는 점입니다. 
저만 빼고 온 가족들이 개인적으로 주님 만나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상담할 때 그 복음은 이미 내가 익히 잘 알고 있었던 내용인데, 뭐가 그리 대단 하는지 고개만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성서침례교회 생활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출석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성서침례교회 학생부 예배를 참석했습니다.

그런 중에 암송숙제를 내 주었는데 그걸 안 외우고 갔습니다.

어렸을때부터 교회다녀서 암송은 거의 하는데 그 때에는 왜 안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암송 안했다고 교회 선생님이라는 분이 얼마나 아프게 손등을 때

린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때릴 수가……’. 너무 억울해 울면서 그 교회 나왔고, 다시는

안간다고 나왔습니다만 온 가족이 교회에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

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저는 암송을 하면 맞지 않기 위해 암송을 했습니다.

그 때 저를 때리신 분은 지금 안양 푸른성서침례교회 담임목사이신 최상

호목사님이십니다.


목포성서침례교회 분위기가 학생들도 목자님(교사)과 일대일 성경 공부

해야 했고, 큐티훈련, 암송도 해야 했기에 저는 그때 당시 목자님이셨던

최상호 목사님과 새벽 6시에 일대일 성경공부하러 목자님 집까지 뛰어가

서 양육을 받았던 터였습니다.


성경공부하고, 암송하고, 큐티훈련받고하기를 몇주가 지났을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올라가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을 암송하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250여 계단을 올라가야 집에 들어가는 데,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하나

님이 나를 사랑해?”가 “진짜로 나를 사랑해!”로 마음으로 다가왔던 것입

니다.

누가 소리친것도 아니었고, 어떤 환상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미한 음성, 말씀속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

어려서부터 익히 알았던 요3:16 말씀을 암송하며 묵상하다가

“왜 나같이 가난하고, 못생긴 학생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야만 했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나같은 아이를 위해? 저 천국으로 갈수 있도록?????”...

이런 질문들이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심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그런 질문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암송했던 하나님의 말씀들이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을 수 밖에 없

었던 죄 많은 어느 중학생 까까머리 학생인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

실이 마음에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서야 모든 문제가 실타래 풀리듯 풀렸습니다.

성서침례교회에 처음 갔을 때 왜 그때 그 성도님이 나에게 예수의 십자

가를 설명했으며, 학교에 심방 오신 목자님이 “진짜로 너 죄 때문에 예

수님이 돌아가신 것 믿니?”라고 물으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그때에서

야 알게 되었고,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 앞에 저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하

게 되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 사실이 내 마음에 믿어졌습니다.

그 엄청난 사실이 내 맘에 믿어지는 것 자체가 기적이자, 하나님의 은혜

였음을 고백합니다.


그 곳에서 얼마나 운지를 모릅니다.

그곳에서 한동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다니...’

‘ 하나님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그 때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장면이 바로 수 없이 많은 집들이었습니다.

그 집들을 보면서 가난하고 고통받고 사는 사람들이 내 눈에 들어 왔습

니다.

예수님 모르고 살아가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불쌍했습니다.

이 고통 가운데 세상살이가 끝나면 예수도 모른 채 지옥에 간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그 때 내 마음에 오는 강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깨지고 상처받고 죽어가는 저 영혼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들

어야 하고,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하는 잃어버린 영혼이다”는 것입

니다.


저는 구원받는 그 날 그 때에 위로부터의 부르심, 소명을 받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잘 전할수 있을까요?”

그 때 생각이 되었던 것은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면 전 생애를 바쳐

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왔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때 하나님께 울면서 ‘주님 나를 받으옵소서’하며 헌신기도

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목사가 되겠습니

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나아가겠습니다.


그들에게 나아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복음만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회복시키는 복음전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사람으로 받아주옵소서”라고 헌신하면서 또 한번 통곡을 했던

그 때 그 시간,,,,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감동과 내 눈에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그 때 받은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죽을 수 밖에 없

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하늘 영광 버리고 오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지금도 이 길을 가는 것에 후회는 결코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 때부터 내 삶이 변했습니다.

소극적이고, 더욱이 말 더듬이였던 제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고 전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거듭나야하고, 행복해

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고, 주님의 눈물을 흘

릴 수가 있었습니다.



3) 주님을 믿고 난 후 ======================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 후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깨닫게 된 후, 중학교

때부터 닉네임이 오목사로 불려지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복음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안수받지 않은 목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부터 친구들은 저를 ‘오목사, 오목

사’하며 조롱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많은 친구들의 신앙상담을

도와 주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가장 큰 변화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명이었습

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어려서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는 말더듬이, 요즘 말로 언어장애

가 있었습니다.

둘째 누님이 친구따라하다가 말을 더듬게 되었고, 바로 윗 형님과 제가

누님을 따라하다가 말더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노래를 부를때는 괜찮은데 책을 읽을때는 너무 심하게 말을 더듬기 때문

에 자연적으로 내성적인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주님 만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말더듬이가 목사라는 별명을

받게된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할려면 왜 그렇게 눈물

이 흐르는지 모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친구들이 내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친구가
우니깐 어딜 가지 못하고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너무나 불쌍하고 불쌍해서 말입니다.

쉬는 시간을 비롯해 시간 날때마다 꼭 할말이 있다고 붙잡아 놓고 복음

은 전해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서 얼마나 이야기

를 했는지 모릅니다.

소극적이고, 말더듬이었던 내 친구들은 저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 너무나도 말을 잘한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 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너 목사하면 말 안더듬겠다!’라는 말

이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오목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친구들, 심지어 이웃 이모, 삼촌이라 부르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고 살았으니깐 말입니다.

그 때부터 얼마나 복음을 전했는지 모릅니다. 무조건 교회와야만 합니

다.

무조건 복음에 대해서는 들어야만 합니다.

친구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붙잡고 울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요,

심지어 사정도 했습니다.

내가 전하기 힘든 친구들은 교회 선생님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행복해져야 한다”는 사

명감을 가지고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진짜로 좋은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는 것을 저는 주님을 영접한

그 때부터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목포교회에서 9월부터 12월까지 안드레전도시합을 하면 최소 100명 정

도 인도하지 않으면 시상식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 전도시합에 전도왕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전도왕 부상으로는 그 때 당시 반지 1돈씩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좋아, 복음이 좋아 얼마나 전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

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임태진 집사님께서 사역자들

이 훈련받았던 노방전도 복음스피치훈련을 시켜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5분 복음 설교자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친구들이 200미터 거리를 두고 복음에 대해서 길거리에서 선포하

는 훈련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숱하게 흘렸던 그 눈물들은 지금도 내 삶의 간증입니

다.


심지어, 버스를 타서 손잡이를 잡고 복음을 전하는 순간들, 역전에서 성

경을 들고 구령 상담하던 그 시간들,,,,,


고등학교를 공고실업계를 간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부르셨다면 이곳에서 사역의 열매를 보여주

십시오. ”

고등학교 3년 동안 매년 수 백명씩 전도해서 교회에 인도했다면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기도모임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공부반을 위해

기도할 때 시작한 친구들은 단 2명, 얼마나 전도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기도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많이 왔지만 열매가 맺지 않자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한 해가 거듭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신실한 제자들을 붙혀주셨고,

수요일에는 등교시간 1시간 전에 학교 잔디밭에 20여명의 믿음의 친구들

과 후배들이 큐티를 나누며 기도하는 모임이 정착이 되었고,

더욱이 졸업하기 전 마지막 학교 성경공부 모임 때는 한 강의실에 가득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계속 대학캠퍼스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제대 후 사역자 훈

련을 받으며, 그리고 9년만의 기다림 속에 들어간 신학훈련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제게 주님이 주신 사명은 이렇습니다. ◈

 

☞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 잃어버린 영혼이 있는 한 살아야 합니다.


☞ 그들을 향한 주님의 눈물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 잃어버린 영혼을 구령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양육하여,

 

▣ 민족과 열방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마음이 잃어버린 영혼과 열방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 2. 자기 소개

 

 

 

“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서 무척 많이 고민하고 기도
했습니다.

제가 성장했던 교회와 목사님들을 기록하면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 같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기록

해 보았습니다.

 

 

1) 교회을 통한 영향 (구원 간증문 참고)

 

주님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는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교회 이야기로 시작하기 원합니다.

중학교 2학년때(1986년) 예수님을 영접한 후부터 신학을 하기 위해 목포

를 떠나오기 전(1998년)까지 목포성서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

다.

중,고등부 학생시절과 대학,청년시절을 보낸 시간들, 특별히 군 제대후에

는 직접적인 사역 안에서 사역자로 헌신해서 교회를 섬겼던 시간들은 어

쩌면 제가 어떻게 앞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믿음의 훈련과 교회의 청사진들을 그리는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모교회였던 목포성서침례교회는 성서침례교회 친교회 안에서보다

는 타교단 목사님들에 의해 더 알려진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대전침례신학대학교 박영철 박사님(그 때 당시 대전침신 기독교

교육학장으로 섬김)을 통해서 많은 침례교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다녀

간 교회였습니다. 

그 때 한참 유명하셨던 이남하 목사님(예수님짜리 저자) 담임하셨던 버

클랜드교회도 함께 참석했던 ‘국제 전신자 사역자 세미나’를 목포교회

중심으로 2번이나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박영철 박사님은 많은 대학원생들이 3박4일씩 다녀가면서 제자사

역에 대한 집중 연구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장요셉목사님은(그때 당시 대학원생)은 ‘목포성서침례교회

를 통해 본 다시 보는 제자사역’이라는 논문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리더는 가 본 만큼 간다.”고...


지금까지 제 인생 여정에 영향력을 준 분들을 보고 자랐음을 말하는 것

이 내 자신을 소개하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의 밑에서 배운만큼, 아니 그 이상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들이 제 사역속에서 넘쳐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래의 세분의 목사님의 영향력이 제 인생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분들

의 영향력을 적어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노향모 목사님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과

장두만 목사님의 성경말씀을 사랑하는 지성과

최종길 목사님의 목회자로서의 갖추어야 할 인격으로

내 자신을 말씀 사역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2) 저에게 영향력을 미쳐 주신 하나님의 사람들

 

a. 노향모 목사
- 영혼 구령이 무엇인지 보여 주신 분.

 

지금의 나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 이 분을 말할 수 밖에 없음은 그 분의 영향력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과 태도가 어떠한지를 제가 보여주신 모델이자, 영적인 아버지같은 분이셨습니다(지금은, 서울 봉천동에서 ‘우리교회’-한국기독교침례회교단소속-에서 목회를 하고 계심).

모든 목사님들이 영혼에 깊은 사랑과 관심이 있으시겠지만, 제가 만났던 목포성서침례교회 담임목사 노향모 목사님은 영혼 구령에 있어서만큼은‘구령광인’이라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복음에 미쳐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사역 안에서 보고 배운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는 복음에 미쳐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저에게 꿈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나도 영혼에 미쳐있는 노향모 목사님처럼 영혼을 구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울고 울며, 또 울고 우셨던 그 분의 모습을 보고 자란 제가 봤던 것은 바로 노향모 목사님을 통해서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울고 울며, 또 울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 앞에서 복음의 헌신자로 제 자신을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린도전서 9장 16절말씀처럼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복음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구원 간증문에서 ‘주님을 믿고 난 후’를 참조) .

또 하나는

그 분의 목회사역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은혜가 있었습니다.

목포성서침례교회(현, 예수사랑침례교회)는 래리채플 목사님과 박희원목사님(지금 미국에서 목회 중)이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개척 한 후 어려운 상황속에서 노향모 목사님이 30대 중반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노향모 목사님은 강서교회 김석규 목사님(강서침례교회 원로목사, 현 강사침례교회 담임목사는 장두만 목사이다.)을 통해 구원받고 거듭난 후 강서교회에서 조력을 하다가 몸이 좋지 않아 목포에서 병원에서 치료하고 있었던 중,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안와서 거듭나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10여명의 성도에서 1,000명 이상의 성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성서침례교회의 말씀 중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10년동안 10,000명 이상이 전도되어 온 역사와 더불어 5,000명 이상이 침례에 순종하였으며, 그 분을 통해 지금 현재 목회의 길로 헌신해 있으신 분만(제가 아는 것만 해도) 20여명이상 걸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노향모 목사님은 존맥아더 목사님의 플락론에 입각하여 제자사역을 통한 교회 성장을 본을 보이셨던 분입니다.

FLOCKS- 플락론( F-Fellowship:교제, L-Leadership:지도력, O-Outreach:전도, C-Caring:돌봄, S-Salt&Service: 소금과 섬김)의 사역 원리를 적용한 교회.

요즘 말하면 셀 사역에서의 두 날개, 즉 대예배와 소그룹에서 성공적인 소그룹 사역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또한, 노향모 목사님은 예배에도 성서적인 예배철학으로 교회 성장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그러다가 90년 초에 불어닥친 목회적 어려움으로 교회는 어려워 졌지만,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97년까지 다시 목포성서침례교회(현, 예수사랑침례교회)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특별예배로는 1,400명 정도가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97년 말에 목회자의 문제로 인해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든지 하나님은 그 분을 통해 아름다운 교회 사역을 일으키셨고,

그 가운데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포성서침례교회와 노향모 목사님을 통해 영혼 사랑이 무엇인지, 제자사역과 교회 사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보게 하셨고,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

 


b. 장두만 목사
- “목회자 같은 신학자 그리고 신학자 같은 목회자가 되라!”고 가르쳐주신 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What does the Scripture say?"
롬 4장 3절, 갈 4장 30절.

 

복음 전하는 그 자체는 구령상담법만으로도 충분하고 가능한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잘 알고 얼마나 잘 가르칠 수 있느냐에 성도들이 좋은 꼴을 먹고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노향모 목사님이 제자사역으로 키운 목사들도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 사역으로 전환을 할때 달라스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오신 허종수 목사(미국에서 목회하고 계시고, 한 때 호산나 칼럼리스트로 잠깐동안 활동.)님과 대전침신 박사코스를 걷던 박영인 목사님(지금 수원중앙침례교회 교구목사로 사역중)을 영입하면서 팀 사역으로 확장했을 때 “왜 꼭, 신학을 하신 분들을 섭외할까?”에 대한 물음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올바른 신학은 목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여줬던 단편적인 예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국내 유일한 강해설교자 배출을 목적으로 세워진 성서침례대학원 대학교교수님들(김우생 총장님, 장두만 목사님, 김택수 목사님, 이재기목사님, 곽철호 목사님, 김광모 목사님 등등)을 통해 저는 말씀의 역량과 목회의 역량을 키울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장두만 목사님을 만난 것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큰 선물 중에 하나였음을 확신하고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잊을 수 없는 강의시간들,,,

조직신학을 다뤄주시면서 가르쳐주셨던 성경, 하나님의 말씀들은 지금도 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다른 동기들이 이상하게 여겼을지 모르지만, 저는 조직신학 강의를 듣고 몇 번이나 제 침대에 와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1)‘서론-성서론’강의를 듣던 중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 제 침대에 와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전에는 추상적으로 무조건 믿었습니다.

그 추상적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는가에 대해 공부할 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침례교도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우리 신앙의 최고의 권위로 두는지에 대해서도 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2)‘구원론’을 통해서는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던 말못할 고민들이 성경 안에 말씀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 못지 않게 구령상담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령할 때마다 영접기도를 시키면서 말할 수 없는 번뇌와 고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영접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을 하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어떻게 믿지 않았을때와 똑같이 살아갈수 있을까?  저것이 예수 믿은 사람일까?,

나를 변화시킨 이 복음은 구원받았다는고 말하는 저 사람을 변화시킬수 없는 것일까?

복음이 겨우 마인드-컨트롤, 정신통일하는 수준인가? 복음이 복받기 위한 하나의 종교적 주술행위인가? ........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성서적인 회개와 믿음에 대해서, 성서적인 영접이라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확인했을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성서적인 신학의 감동을 기록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열심히 성경적 신학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장두만 목사님이 우리를 향해 ‘돌팔이 의사는 사람을 죽이지만, 잘못된 목사는 영혼을 죽이게 한다!’는 책망과 함께 ‘제군들은-장두만목사님이 신학생들을 부를때 쓰는 말- 영혼를 살려야 하는 의대생이기에 얼마만큼 공부해야 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잘 가르쳐야 하는 목사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은 말씀 앞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감독과 집사와 인격적인 차이는 없지만, 은사적인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르치기를 잘하며’-딤후 3장 말씀- 라는 말씀을 배우면서 하나님은 저를 또 하나의 그릇으로 준비시키셨음을 확신했습니다.

복음 구령자의 사명과 함께 목사로서의 준비를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장두만 목사님을 통해 목회자 같은 신학자, 신학자 같은 목회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이런 귀한 은사님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c. 최종길 목사
- “인격적인 목회자가 되라!”고 본을 보이신 분

 

또 한분의 목사님을 소개할 분이 계십니다. 

벧엘성서침례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최종길 목사님이십니다.
(참고로, 목포성서침례교회는 벧엘성서침례교회에서 파송하여 세운 개척 교회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목회자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은 이 분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성서침례대학원 대학교 총장님이신 김우생 목사님은 목회학 시간때에 거듭 거듭 강조하셨던 말씀 중에 “사역은 인격으로 합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불광동 성서침례교회 김우생 목사님의 사역을 12년 6개월동안 옆에서 섬겼던 분이 바로 최종길 목사님이십니다.


벧엘교회를 조력하는 가운데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최종길 목사님이 벧엘교회 사역을 하면서 조력자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조력자의 문제로 힘들어 하실 그 때, 저도 조력자로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사임한 후 최종길 목사님의 태도는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목회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주님이 기뻐할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벧엘교회 집사회의에서 그 분의 사임건에 대해서 목사님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런 후에 목사님은 그 분에게 사역지 선정과 상관없이 지금 지급되는 사례비를 그대로 6개월 지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뭐 6개월정도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때 당시 목사님 사례비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교회 재정 상황 속에서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집사님들 중 몇 분은 ‘교회가 어려운데 그러면 안됩니다.’라고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교회의 축복입니다."라며 단호하고 분명하게 그 분을 6개월동안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한 대로 그렇게 집행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개인적으로 교제할 때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어쩌면 그 분은 나와 맞지 않았을 뿐이네. 어찌 되었든지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우해 줘야 되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 압니다.

그때 교회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었고, 목사님 사역에 얼마나 힘들게 했고, 더욱이 교회 재정 상태가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저는 잘 압니다.

제 마음에 잔잔히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목사가 갖추어야 할 인격이구나!!!”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목회하는 가운데 목회자와 조력자 간에 이렇게 선을 베푸는 목사님을 모신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경험이자, 좋은 모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사역은 담임목사와 전도사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조력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희 목사님만 그러시겠습니까? 모든 목사님이 조력자들에게 그럴줄 믿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목회자와 조력자 관계가 성립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력한 지, 10개월 정도가 되었을 즈음 갑자기 목사님이 저를 불러서 어딜 함께 가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심방인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갑자기 양복집을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양복집에서 목사님은 옷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저는 당연히 불평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입으실 옷이면 사모님과 오셔서 고르시던지 하시지, 왜 나를 데려와서 이렇게 세워놓으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교차하던 그 찰나에 여 직원이 다가와서 “전도사님 되시죠? 이곳으로 따라오십시오.” 하시더니 사이즈를 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옷을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우리 목사님 옷 사러 오신것 같다고 했더니, 그 여 직원이 하는 말이 “목사님은 전도사님 옷을 봐 달라고 하던데요?” 아니, 아들도 아니고, 조력자인데@#$%^&*

수 많은 배려도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까지 조력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모든 전도사님들은 저처럼 목사님에게 속아서 양복집을 가야만 했고, 그 양복에 묻어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저도 최종길 목사님처럼 격려하며, 섬기며 도와주는 목사가 되야겠다고 다짐 다짐 했습니다(이런 사랑의 표현은 너무나 많습니다. 저도 받은데로 섬기고 싶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저의 교육에 관련된 학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최종길 목사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학위가 그다지 필요하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목포교회에서 복음으로만으로도 사역을 잘 감당해 내고, 교회에서 목사안수로 그 분의 인격을 검증함으로 사역하는데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우리 신학교가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육부 정식 인가 학위가 나오지만 저희 때는 그저 친교회 인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마치고 난 후 저는 목사님과 공부-학위-부분에 교제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더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전도사, 내면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듯, 외적인 준비도 중요합니다.”는 말씀과 함께 많은 시간을 앞으로 사역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과 같이 생각하시면서 아버지가 아들의 미래를 바라보시듯 말씀하신 부분이여서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3학년에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목사님께서 모든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중간고사 기간과 기말고사 기간은 일주일씩 공부시간을 허락해 주셨고, 출석 수업때도 모든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방송대 졸업(법학사 취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식을 다녀 온 후, 목사님께 졸업장을 드렸더니 목사님이 저를 안아주시면서 고생했다고 격려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도리어 제가 목사님을 안아드리며 감사해 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전에 공부했었던 신학교 교과과정을 M.Div 신학학위로 소급받을 수 계기가 되었고, 공부했던 문학석사 M.A.연구과정은 교육부 인가 Th.M으로 소급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친교회 안에 많은 전도사들이 학위문제 때문에 공부는 하지만 공부시간이 사역에 연관되어 거의 대부분이 자포자기 현상에 쳐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해 주시고 배려를 해 주시는 목사님을 만났다는 것이 저에게는 축복입니다.

은혜를 받을때마다 “주님, 저도 이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귀한 분들 밑에서 보고, 자라고, 훈련되어졌던 지난 시간들이었습니다.

정말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양육하며, 인격적인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지나온 길에게 경험케 하시고,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 라는 존재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구령하고, 말씀으로 양육하고, 말씀가운데 교제하며,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오늘도 살아가기 원합니다.


나를 사랑하사되,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내 생명 바쳐 섬기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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